작품 너머 이야기가 서로의 마음속에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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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작품 너머 이야기가 서로의 마음속에 머물기를 협업자와의 시간은 작품 완성 이상의 것…결과 너머의 자리

기사입력2025-09-19 08:31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작품 정보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작가의 이름이다. 가장 먼저 쓰인 이름은 그것의 책임자라는 의미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기. 너무 당연하게도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작품은 내가 만들고 책임져야 할 결과물이지만, 작품의 모든 부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전시, 워크숍, 리서치, 쇼케이스, 상영회 등. 작업을 발표할 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있지만 이 모든 일은 온전히 작가 혼자가 준비하고 진행하기 어렵다. 제작 과정 중에 이야기를 나눈 상대방, 전시 출품 과정을 돕는 큐레이터, 작업 제작을 도와주는 테크니션, 작업 속에 등장하는 인물 등.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야지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볼 때면 작가가 내 눈앞에 놓인 것을 만들기 위해 한 여러 선택을 상상하곤 한다.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건네고 싶었나요?’ 작품과 작가에게 말을 걸며 출렁였을 마음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보통 감상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요즈음 나는 그 다음으로 작품에 참여한 협업자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작품이 만들어질 때 함께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나눈 이야기와 시간을 상상한다. 작품을 갓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최근에 신작 제작을 위해 일본 오사카에 다녀왔다. 카메라와 필름을 이고 지고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뭇 여행과 여정이 그렇듯 일상이라는 일과에서 빠져나오면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다녀왔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여정으로부터 깨닫는 나의 삶과 선택. 즉, 그간 내가 꾸려 온 히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오사카에서 돌아온 이후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한 뒤 비로소 영상 파일을 열어 보기 전까지 더위에 필름이 녹아 버린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기록된 이미지는 셔터를 누른 순간들과 거의 일치했고, 당시에 느꼈던 습도와 더위 맑고 밝은 날씨를 담는 영상이었다. 안심한 이후 며칠간 영상을 돌려 보며 마음속 한구석에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영상을 작품으로 엮기 위해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다.’ 어떤 논리적인 이유나 당위는 없었다. 직감. 혹은 무조건적이고도 맹목적인 확신…. 신작 제작을 함께 진행하고 있던 큐레이터에게 내 생각을 알리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 끝에 그에게 긴 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젊은 여성 음악가 우쿠 카사이(uku kasai)에게.

<촬영=박선호>

우쿠 카사이는 도쿄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로 전자음과 목소리를 활용해 섬세한 음악을 제작해 왔다. 스포티파이(Spotify)의 알고리즘이 추천해 처음 그의 음악을 들어봤다. 그에 관한 호기심이 생겨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국내 뮤지션이 아니라 정보를 잘 찾을 수 없었다. 음악을 들을 때면 한 곡 한 곡씩을 스트리밍(streaming)하며 듣는 게 익숙한 나였지만, 왜인지 앨범을 통째로 듣는 일이 즐거웠다. 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느껴지는 어떤 느낌…. 그 느낌에 이끌렸다. 성별, 나이, 성격 모든 것이 미스터리에 머물러 있었고, 협업을 제안한 뒤 구체적인 요청 메일을 써 내려가며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의 대화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번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으므로, 여러 궁리를 해봤다.

우선 그에게 나를 잘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이후에는 내가 바라는 점을 최대한 상세하게 작성해 무엇을 전달할지 혹은 전달하지 않을지를 따져 보았다. 나는 한국어를, 그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우리는 영어로 소통했지만, 그가 조금 더 요청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요청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요청과 요구는 나의 몫이지만 선택과 결정에 최대한 정확하게 가닿고자 한 고민의 결과였다. 메일을 보내고 첫 시안이 돌아올 때까지 그가 잘 해낼 거라고 온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첫 이야기를 주고받고 약 일주일이 지나, 그에게서 첫 시안이 도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삼분 남짓 한 음악을 받아서 재생했다. 거친 스케치였지만 바라고 그리던 소리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서로가 해야 할 일을 그저 충실하게 해낸 거라고 말해볼 수도 있지만, 내게 음악의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시안을 수정해 줄 때마다 내게 “What do you think?”라고 물어보았고, 나는 늘 그가 보내 준 음악이 좋았다. 음악의 제목은 제작 중인 영상 작품의 영어 제목으로 제안하며 그의 작업과 나의 작업 사이의 연결점을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 우리는 총 스물다섯 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비로소 음악이 완성됐다. 그의 도움으로, 작업 중인 영상이 나 혼자서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해졌다.

협업자와의 시간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 이상으로 값지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체로 즐겁지만, 서로의 생각과 지향점 그리고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때 속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 사이 시간은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시장에서는 눈앞에 놓인 결과만을 보게 될 뿐이다. 허나, 작품이 여러 사람의 손길과 대화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와 시간을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만드는 사람의 삶과 태도, 그리고 함께한 이들의 목소리는 작품 속에 잘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남아 있다. 작가들은 관객이 작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작품 너머의 시간을 함께 느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질 수 있도록 가능한 성심으로 과정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작품 너머의 이야기가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서로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