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매개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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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책을 매개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다 책과 삶…존 버거의 책들(All Pages for John Berger)

기사입력2025-08-28 08:3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올해 겨울 연휴가 시작되기 전, 아직 쓰지 않은 기획안과 씨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에 커다란 테이블의 이미지가 불쑥 떠오르면서부터. 테이블이 놓인 공간 뒤편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고, 그 너머로 부드럽고 따듯한 공기와 함께 빛이 가득 들어왔다. 졸음이 감도는 듯한…, 그 장면 속 계절은 봄이었다.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더미로 쌓였기에 잔상을 떨쳐내 보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에 그 장면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밝은 빛이 감도는 공간에 놓인 캐러멜 색 나무 테이블. 그 위에 책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긴 의자에 둘러앉아 책을 읽거나 보고 있다. 코팅되지 않은 거친 질감을 가진 종이로 만든 책 표지들. 다섯 권, 열 권, 스무 권…스물 여섯 권. 총 스물 여섯 권의 책. 어떤 사람은 꽤나 진지하게, 어떤 사람은 무심히 책을 넘기고 있었다.

‘이 책이 모두 놓인 테이블을 보고 싶다.’ 어느새 그 장면을 구현하기 위한 꽤 구체적인 방법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번역된 책이 스물 여섯 권이나 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모든 책이 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옮긴 사람들과 그 시간을 알아채고 함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를 떠올렸다.

여러 날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을 정리해 한 벌의 문서를 작성했다. 한 사람이 쓴 책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사람들이 고요하게 읽어볼 수 있는 장면을 계속해서 그려 보며. 이 작은 소망으로부터 프로젝트 ‘존 버거의 책들 All Pages for John Berger’이 시작되었다.

기둥서점 프로젝트 ‘존 버거의 책들’(2025.6.17.~7.6.) 전경. 사진 제공:일민미술관. 사진 컨텐츠 지원:서울특별시, (사)서울특별시미술관협의회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미술비평가이자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지성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술평론에서 출발해 문학과 예술, 인문, 사회 전반에 관한 깊고 명쾌한 글을 써 왔다. 자신을 ‘이야기꾼’이라고 불렀던 그는 약 60년 동안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름답고 명료한 문장을 남겼다.

나 역시 대학 1학년 글쓰기 수업에서 존 버거의 대표작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를 접하며 그를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후 수년간 그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종종 그의 책과 마주칠 때마다 ‘존 버거라는 한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가 궁금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가 평생에 걸쳐 남겨본 것들을 들여다볼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2월, 책 네 권을 읽었다. 3월에는 다섯 권을 더 읽었고, 5월에는 여러 권을 훑어보며 빠르게 읽었다. 그렇게 읽고, 머물고 생각하는 시간을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협업자들과 함께하게 되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프로젝트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출판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모으고,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공간을 구상하고, 크고 작은 인쇄물을 제작했으며, 존 버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기획했다.

여름이 시작할 즈음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그 커다란 테이블이 실제 공간에 놓였다. 그 위에 책이 하나둘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사람들이 책을 펼쳐본 흔적을 발견할 때면 ‘한 사람의 글이 우리에게 닿는 방식은 얼마나 다층적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책이 누군가의 손에 닿고, 읽히고, 이야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다. 이 모든 과정이 어쩌면 아주 긴 독서의 연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테이블 앞에서 누군가는 처음으로 그의 책을 펼쳤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다시 그의 문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문장을 사람들과 나누며 책 옆에 잠시 머무르다 갔다. 프로젝트가 종료되는 날 마지막으로 그 커다란 테이블을 보기 위해 멀찍이 물러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 사진 속 마지막 장면은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책을 펼쳐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존 버거의 책들’은 한 사람의 글과 삶을 천천히 읽어내리는 일에서 시작되고 읽는 경험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끝났다. 마치 꿈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졌지만, 그것이 완전한 끝이 아니라 믿고 싶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존 버거의 스물여섯 권을 다 읽지 못했다. 아마도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채, 아주 오래 읽게 될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